달자에게도 봄은 온다
어제보다 시장은 빨리 조용해졌다.
9시가 되어 달자는 난로 앞에 앉아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가게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혼자 있을 땐 가게 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문 닫는 시간이 들쑥날쑥하면 매출에 지장이 생긴다. 신용의 문제이기도 했다.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배신감에 휩싸일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코코아를 소리 내서 마셨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개미 새끼 하나 얼씬도 않는 가게 안은 적막했다.
‘지금쯤이면 만났겠지?’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벽시계로 향한다. 외롭다. 이럴 땐 태구라도 나타나서 침 튀어가며 떠들거나 귀찮게 굴었으면 하고 바라게도 된다.
태구, 강태구…… 불러? 마뜩치 않았지만 휴대폰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코코아잔을 들고 있던 손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태구의 번호를 누르려다 망설이는 눈빛으로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역시 태구는 의지할 상대가 못 된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속이 차고 아렸다. 저녁을 잔뜩 먹었는데도 뱃속이 헛헛한 건 물론 이상하리만치 고독감이 뼈에 사무쳐 괜스레 코를 훌쩍거리게도 되었다.
엄마와 김정현이 만나서 데이트를 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하게 죄였다. 쓰흡, 훌쩍. 코끝이 시려 다시 숨을 크게 들이 마시게 된다.
그녀는 코코아를 마시면서도 단 게 당겨서 주머니에서 젤리빈즈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오도독오도독 일부러 깨물어 먹으면서 소음을 만들 때였다. 가게 문이 열렸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일어나 상대를 응시했다.
“어!”
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자, 목도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시락 남은 거 있나 싶어서 들렀는데, 있니?”
“울 엄마 안 만나요?”
“내가 너희 엄마를 왜 만나야 하지?”
“왜라니요? 데이트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왜 너희 엄마하고 데이트를 하냐고.”
정현이 목도리를 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코코아와 사탕 봉지를 흘기며 입을 열었다.
“밤에 단 거 먹으면 충치 생겨. 말도 징글징글하게 안 듣는구나. 도시락 있어, 없어?”
“우, 우리 엄마랑 사귀잖아요!”
달자가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쥔 자세로 묻자, 정현의 입매가 가로로 늘어났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을 짧게 뱉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인마, 너 번지수 틀렸어.”
정현은 진열대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랑 밤에 데이트했잖아요!”
“그런 적 없어.”
“봤단 말이에요. 주차장에서…… 엄마랑 김 쌤 만나는 거.”
그는 반찬을 고르는 척하면서 눈을 흘겼다. 진열대 유리에 비친 달자는 울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틀렸어, 내가 아니야.”
정현은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며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날 울 엄마를 왜 만난 거예요? 왜 울 엄마랑 같은 차에 탔어요?”
“그건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어서였지. 설득시키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그럼 반대한다는 사람이 김 쌤? 달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어둡고 절망스럽던 가슴에 한 점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럼 누가 사귀는 거죠? 김 쌤은 알고 있는 사람인가요?”
“비밀이다. 엄마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먼저 말하는 것도 그래.”
“왜요!”
“엄마는 지금 데이트 중이니까.”
정현은 구구절절하게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곤 손가락으로 계란찜을 가리켰다.
“이거랑, 장조림, 소고기국…… 이거 한우야?”
“거기 생산지 표시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김 쌤이 아니라는 거죠?”
“엄마한테 전화해 봐. 데이트 중이라고 할 거야.”
달자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거라는 말에 냉큼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가슴에 댄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서서 진열대를 흥미롭게 보는 정현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