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서랍
세상의 모든 생을 압축하면 한 편의 시詩가 된다
이정록 시인의 20년 만의 첫 산문집
시시콜콜한 일상이 시가 되는 특별한 순간들을 기록하다
포복절도할 해학과 눈물겨운 서정을 동시에 지닌 시인으로, 시집 《정말》, 《의자》, 《제비꽃 여인숙》으로 알려진 이정록 시인의 첫 산문집 《시인의 서랍》이 출간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지 20년 만에 처음 쓴 산문집에서 저자는 자신의 시가 되었던 가족 이야기에서부터 일상이 시로 바뀌는 특별한 순간들, 그리고 저자가 몸소 깨우친 시작詩作에 관한 편지들을 모두 담았다.
1부 〈밥상머리〉에서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가족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툭툭 내뱉는 어머니의 말들이 곧 시가 된 이야기, 자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못 간 누나가 첫 월급으로 들여놓은 전집에 부록으로 딸려온 시집이 생애 첫 시집이었음을 고백하는 저자는, 자신의 시 뿌리가 곧 가족이었음을 고백한다.
2부 〈좁쌀일기〉에서는 어린 시절 추억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는 일상 이야기로, 저자 특유의 유머와 감성이 버무려진 글들이 이어진다.
3부 〈시 줍는 사람〉에서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시를 쓰며 몸으로 배운 가장 큰 것은 지금 곁에 있는 것부터 껴안고 살라는 ‘문지방 시학’이다. 이 외에도 시를 쓰면서 처절하게 느꼈던 베테랑 시인의 솔직한 경험들이 잘 녹아 있다.
시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선생님이 된 소년의 가슴 아픈 가족 이야기
가난이 익숙했던 어린 시절, 저자에게는 밥상머리 앞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이 세계의 전부였다.
그의 글 속에는 부엌을 수시로 드나들며 식솔들의 밥상을 차려내던 어머니의 한숨, 낮술 한잔 걸치고 문지방을 베고 누워 잠을 자던 아버지의 부어오른 배, 냇가에서 놀다 배탈이 난 손자의 배를 밤새 쓰다듬어주던 할머니의 거친 손, 남동생에게 학교를 양보하고 무논가에서 냉이와 씀바귀를 캐던 누나의 뒷모습, 결혼반지를 팔고도 환한 보름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아내가 보인다.
그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각별하다. 저자의 시 안에서 빛났던 어머니의 입담은 이번 책에서도 그러하다.
세상 모든 말의 뿌리인 어머니, 식구들을 치맛자락에 폭 감싸 안으시고 살아내신 어머니, 농사를 지으면서도 그늘 아래에서 더 잘 크는 고추를 보며 인생 농사도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제 가슴속 그늘을 잘 경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는 어머니, 오랜 병치레를 한 남편을 원망할 만도 하련만 물앵두 먹으로 오는 기똥차게 잘생긴 새가 아버지가 같다며 농담을 던지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
저자가 그리워하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가는소금을 손가락으로 찍어 안주 삼던 아버지. 이른 나이에 아버지와 동생 셋을 잃고 무거웠을 종손의 어깨를 지녔던 분. 돌아가시기 전, 유언 한마디 직접 안 하시고 대신 당신이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 안쪽에 새겨놓았던 한마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남들보다 두 해나 먼저 학교를 간 탓에 친구들에게 치이고 구석에서 울던 소년이 있었고, 자신의 교련복을 사기 위해 철 지난 배추와 무를 팔러가는 어머니를 모른 척하던 부끄러운 소년이 있었다. 담배밭에서 밭일을 하다가 마주친 예쁜 선생님을 보고 가슴이 방망이질 치던 소년은 어느새 자라 시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선생님이 되었다.
코끝이 찡하다가도 슬며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감성
저자의 글 안에는 와글와글 사람이 산다.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를 받아 적기만 하면 시가 되는 어머니가 살고, 품앗이 대가로 손자 먹을 예쁜 과일들만 광주리에 담아오는 할머니가 살고, 아버지의 가벼운 무게를 알게 해준 친구가 살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걸어 학생들을 만나러 오는 선생님이 살고, 책을 사지도 않고 읽기만 하는 학생 손님에게 깨끗이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서점 누나가 산다. 그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저자의 글에는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투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한 느긋한 시선이 있다. 소와 오리를 한 식구처럼 챙기던 소년이 있고, 뜨거운 구정물을 버리기 전에 훠어이 훠어이 외치며 도랑 속 작은 생명들까지 걱정하던 할머니가 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가 잊고 지낸 그 시절 그 풍경이 시인의 서랍에는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들과 웃고 울고 지내온 이야기가 하나의 시로 적히는 특별한 순간을 공유하고,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속에서 남다른 감성으로 시를 써온 자신의 비밀 서랍까지 모두 열어 보인다.
일상의 부록으로 시를 주우며 사는 사람
시인 이정록은 지금까지 총 6권의 시집을 낸 베테랑 시인이다. 시인으로 살아온 20년간, 그는 꾸준히 ‘방 안 삼천리! 문지방 시학!’을 외쳐왔다. 시인은 누구인가? 시란 어떻게 쓰는 것인가? 이정록 시인은 아파트 화단 하나를 꾸미며 시를 쓰고, 눈이 많이 내려 멈춰선 버스 안에서 시를 쓴다. 행상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재치 있는 멘트가, 감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대화가, 결혼반지를 판 돈으로 아내의 피아노를 산 사연들이 죄다 시가 된다.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합니다. 지금 전화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걸 쓰라고 합니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 합니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지요.
p.209 〈쓴다는 것〉
때로 시를 쓰는 것이 마당 한구석에서 혼자 땅을 파며 구덩이에 갇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고 몸서리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샘솟는 우물 밑바닥의 지하수면에 정신을 들이밀고 싶은’ 욕망과 바닥을 치고 오르며 뒤집어엎은 자리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퍼 올리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끝에서 시와 함께 늘 새로이 태어나기를 바라며 오늘도 원고지 앞에 펜을 들고 앉는다.